2012년 10월 4일 목요일

세계1위 : 삼성의 반도체 신화의 역사


세계1위 : 삼성의 반도체 신화의 역사




-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동경 구상 -


반도체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1983년. 삼성은 당시 세계 최고 기술인 64KD램 개발을 선언하고, 곧바로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 zero에서 시작된 외로운 전쟁이었다.

기술 이전을 두려워하는 선진국의 장벽에 막혀 자체개발에 돌입한지 6개월. 당시로서는 가장 정밀하고 가장 용량이 큰 초대규모 집적회로 기술. 300단계가 넘는 복잡한 제조공정. 고난도의 교육과정을 거쳐 드디어 6만 4천개의 셀이 모두다 작동하는 64k D램이 완성되었다. 해외원조에 의존하던 가난한 나라, 세계시장에 내놓을 기술 하나가 없는 기술 후진국에서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의 쾌거였다.

이윤우 부회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우리나라와 같이 재원도 없고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결국은 국산 인력을 이용해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기에 64k D램을 개발함으로 해서, 우리나라가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는 그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 삼성 이건희 회장의 1등 전략 -
"우리가 세계 1위로 발돋움 하기 위해 월반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남의 뒤만 쫓을 것인가? 아니면 남보다 앞서나갈 것인가? 위기의 순간은 끊임없이 닥쳐왔다.

신윤승 부사장 (삼성전사 반도체 총괄 디램 개발실)
 "반도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더 작은 칩을 얼마나 빨리, 3개월, 6개월...빨리 시장에 내놓느냐가 핵심입니다."




첨단기술 개발에 뛰어든지 30년만에 0.1 마이크로미터 미만 즉, 머리카락 한 올의 1/1000 에 이르는 초정밀 반도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치열한 기술경쟁의 결과 92년 D램 분야 1위, 93년 메모리 분야 1위에 올라 지금껏 정상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황창규 사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기술에 대한 투자, 열정, 그리고 불가능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도전정신. risk를 겁내지 않고
Taking하는, Risk Taking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의 삼성반도체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코리아 반도체 넘버원. 그것은 1등 기술을 향한 쉼 없는 도전의 결과였다.

사회자 유인촌 설명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우리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0년대 초. 흑백 TV 하나 만들 기술조차 없던 그때. 우리가 선진국을 부러워하면서 늘 외쳐대던 말이 '기술개발' 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반도체 기술에 있어서만큼은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또 그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반도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 보여지는 컴퓨터, 휴대폰, 게임기 같은 현대인들의 필수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이 반도체입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것이 바로 컴퓨터에 내장되어 있는 반도체입니다. 아주 작죠? 요즘 1G, 2G 하는 대용량의 메모리를 갖춘 최첨단의 컴퓨터는 256M D램이라는 반도체가 개발되면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이 반도체의 원재료인 '실리콘 웨이퍼'를 가공해서 만든 까만색 반도체 칩 한개의 무게가 약 0.3G. 손톱만큼 작은 그 칩 1개의 가격이 무려 3달러. 1KG이면 무려 1천 만원대에 이르는 아주 고부가가치 산업입니다. 반도체가 앞으로 우리 경제를 10년 책임질 것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수출의 효자상품, 우리 경제의 대들보 같은 존재가 바로 이 반도체인 것입니다. 삼성이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나선것이 1974년.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있던 최첨단의 기술의 세계에 뛰어든 것입니다. 걷지 못하는 어린 아기가, 달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 같이 무모한 것이였습니다."


지난 30년간의 반도체 개발 과정이 전시된 삼성 반도체 역사박물관, 일본의 하청기업으로 반도체를 조립 생산하던 70년대. 한국에서 한 기업이 첨단기술 개발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세계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러나 반도체가 모든 산업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정확했다.


83년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64K 디램. 당시 개발에 참여했던 팀원들이 남긴 일지에는 험난했던 과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세계 3번째로 이뤄낸 그 사건은 세계 반도체 업계를 뒤흔드는 세기의 사건이었다.


1974년 미국과 합작으로 국내 최초의 반도체 회사 '한국 반도체'가 설립되었으나 2개월 만에 자금난에 봉착한다. 그때 삼성이 이 회사의 인수에 나섰다.

이윤우 부회장
"당시 삼성의 경영진들은 '반도체 사업'에 대해 그렇게 주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건희 회장께서 여러번 설득을 했었는데, 이해를 해주지 않아서 이건희 회장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인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해외 산업계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이건희 회장은 미래 핵심 기술이 반도체임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삼성반도체는 고밀도 집적회로 즉, LSI를 갖춘 반도체 생산에 돌입한다. 그 결과 1975년 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 텔레비젼 색신호 집적회로가 개발됐다. 본격적인 컬러 텔레비젼 시대를 반도체가 열어준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종주국 미국 실리콘밸리는 이미 한단계 앞서고 있었다. 인텔, 모스텍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초대규모 집적회로 VLSI 개발을 끝낸 상태였다. VLSI란 트랜지스터 (Transistor)가 십만개까지 집적되는 초정밀 집적회로다. 삼성반도체가 만들고 있던 LSI에 비해 천배나 집적도가 높아진 것으로 제작 공정 역시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반도체였다.

세계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이 첨단기술이 필요했다. 먼저 반도체 사업 전반을 검토할 사전 조사팀이 만들어졌다. 당시 이 개발 과정을 총지휘한 이는 이윤우 이사.

이윤우
"반도체 산업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거대한 자본이 들어가고, 또 아주 고도의 높은 기술이 필요한 것이라서 이러한 자원과 자본이 들어가는 사업에 삼성이 뛰어가서 성공할 수 있을까? 괜히 시작해서 삼성이 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도 많았고."


미국, 일본 등지를 돌며 조사한 반도체 사업 계획서가 만들어졌다. 반도체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로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막대한 투자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문제였다. 그러나 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반도체 연구소가 설립됐다. 회사 내에서 불거져 나오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 추진을 결정한 것이다.

이윤우 부회장
"사람들은 속으로 아주 냉소적이었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목표는 단순한 반도체 개발이 아니였다. 선진국 수준의 64K 디램 개발. 총력을 기울여 기술 격차를 줄이겠다는 뜻이였다. 결국 64K 디램 개발팀이 꾸려졌고, 설계 담당자로 조수인 사원이 포함됐다. 총 107명의 64K 디램 기술개발팀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기술개발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반도체를 만들어본 경험도, 전문지식도 부족했다. 국내에서는 조언을 해줄 전문가나 관련 자료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조수인 부사장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경험도 인력도 시설도 없는 환경에서 개발을 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은..."


이때 개발팀은 무박2일간, 64km 행군을 단행했다. 앞으로 벌어질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정신력과 체력, 그리고 굳건한 팀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는 반도체인의 신조를 세우고 외웠다.

한편 핵심 기술에 대한 접근이 어렵자, 삼성은 미국 마이크론사와 기술협약 체결했다. 64K 디램을 만들 수 있는 초대규모 집적회로 VLSI에 대한 기술 이전을 기대하며 6명의 연수팀이 미국에 파견됐다. 그런데 연수팀의 집요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관련된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가 없었다.

조수인 부사장
"마이크론사에서 삼성에 기술 이전을 한다고 했던 것 자체가 MASK나 제품의 제작 사양에 대한 스팩을 넘긴 걸로만 기술 이전이 끝났다고 생각 했던 거고, 그런 관점에서 연수라는 것 자체가 마이크론 사에서는 달갑지 않았던 것이였죠"


간신히 연수팀 2명에게 공장 내부 견학이 허락됐다. 그런데 노동절을 맞아 공장 가동이 멈춰있던 날,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만다. 팀원 중 한명이 우연히 컴퓨터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마이크론 사는 기술 협정을 위반했다며 그 자리에서 연수팀을 추방했다. 첨단기술을 가지고 있던 마이크론 사는 그만큼 기술 유출에 예민했던 것이다.

조수인 부사장
"기술이 없어서 서러웠고, 나라가 힘이 없으니까 더더욱 천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기술을 습득을 해서 언젠가는 이 회사를 넘어보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계기도 됐고."


자체개발, 이제 그 방법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개발팀이 손에 넣은 것은 VLSI 집적 회로도와 MASK. 완제품을 놓고 하나하나 뜯어보며 기술을 역추적하는 방법만이 남았다. 그때 삼성은 기술개발과 생산 시스템을 동시에 갖추기 위해 반도체 공장 설립에 착수했다. 공사가 끝나고 각종 기계 설비가 갖춰지고 있던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수억 원에 달하는 기계 운송을 앞두고 걸려온 확인 전화, 문제는 공장으로 진입하는 도로였다. 스텝퍼라는 이 장비는 광학기기와 정밀기기로 구성되어 있어 충격과 진동에 매우 약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흥 공장 주변 도로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박승구 차장 (삼성물산 화성단지 공사담당)
"고가의 장비가 들어와야 되는데, 폭도 좁고 굴곡이 심해서 공사를 긴급하게 해야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공사를 맡았던 보수팀 전원이 풀가동됐으나 역부족이었다. 기흥 공장에서 설비와 사전작업을 진행중이던 직원 전원이 달려나와 합세했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평편하게 만들기 위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과연 시간 안에 공사를 끝낼 수 있을까?

장비를 실은 차량이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운송팀 역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 마지막 남은 구간의 도로 사정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최대한 속도를 낮춰 기흥으로 들어선 순간, 운송팀은 그들의 두 눈을 의심했다. 오전 10시 전까지만 해도 비포장 도로였던 공장 진입로 4km 구간이 말끔히 정리된 것이다. 이 민감한 장비를 최대한 안전하게 공장에 설치하겠다는 전 직원의 의지와 노력이 이뤄낸 기적같은 일이였다.

김재욱 사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메모리제조담당)
"그때는 우리가 거의 도로 정리에만 전원이 매진해서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걸 어떻게 했엇을까?"


한편 기술팀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이크론사에서 받은 회로도는 장비환경이 달라지자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회로도가 완성된다고 해서 바로 제품 제작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였다. 당시 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제품기술개발 담당자 류병일 과장.

류병일 부사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반도체연구소)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고, 또 저희들도 직접 경험 못해본 것을 도전해야 했던 것이라서 이것이 될 수 있을까 확신을 갖기 힘든 상태에서 진행됐습니다."


반도체 개발은 공정과정도 복잡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공정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정밀한 작업이라는 점이다. 개발팀은 기존의 LSI 장비를 보완해가며 연구를 진행했다. 6만 4천개 트랜지스터가 그려진 초대규모 집적회로가 만들어졌다.


다음 작업은 이 직접회로를 손바닥만한 마스크에 담아내는 일이다. 마스크는 회로 형태를 나타내는 판으로, 반도체 회로를 찍어주는 포토 공정에서 쓰이는 것이다.


무려 300 단계가 넘는 64K 디램 제조 공정 중의 기본은 바로 이 웨이퍼.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웨이퍼는 감광액을 발라 사진 식각이 가능하게 하고,


집적회로가 찍힌 마스크를 세운 뒤 빛을 쏜다. 그러면 마스크의 회로가 웨이퍼에 위에 다시 새겨지게 된다.


이 작은 회로가 곧 반도체 칩이다. 당시에 사용되던 웨이퍼의 크기는 4인치. 여기에 200여개의 집적회로를 새겨 넣으려면 회로도의 크기를 축소해야 한다. 반도체의 공정 중 가장 핵심적인 단계가 이 대목이다.

복잡한 회로를 여러축으로 잘라서 축소 인쇄한 마스크. 이것이 반도체 회로 원판이 된다. 마스크로 부터 회로를 넘겨받은 웨이퍼는 또 한번의 중요한 공정을 거쳐야 된다. 웨이퍼의 전기가 작동할 수 있도록 붕소와 인 등 불순물을 주입하고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표면처리가 가해진다.

류병일 부사장
"300개의 공정을 거쳐서 설계도면이었던 것들을 성능을 갖는 제품으로 만들어서, 다시 말해 64K D램 6만 4천개의 셀이 하나도 죽지 않고 동작하는, 메모리의 기능을 수행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설계도면에서부터 실제제작 과정이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죠."

- 현미경으로 관찰한 회로 -

이 반도체 제조 공정에 따라 웨이퍼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과연 집적회로가 제대로 새겨져 있을까? 수십장의 웨이퍼가 불량으로 판명됐다. 공정은 모두 개발 되었으나 6만 4천개의 셀이 모두 작동하는 완성품은 아니였다. 64K 디램이 완성되는 D-day로 잡은 날은 1983년 11월 15일. 전체 공정을 재점검하며 실험이 반복됐다. 연일 밤샘 작업이 이어졌으나 원하는 결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정밀 현미경 측정 장비를 이용해 웨이퍼에 형성된 회로를 일일히 점검했다. 초대형 집적회로를 손톱크기보다 작은 칩 안에 집어넣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 드디어 64K 디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또다시 지루한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의 칩 속에 새겨진 6만 4천개의 셀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30일이 지나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칩은 나오지 않았다. 불량이 속출해 낙심하고 있던 개발팀에 희소식이 전해진 것은 11월 10일. 50%가량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불량률이 제로인 칩이 나타났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그때. All Pass, 성공이였다. 순간, 모여있던 팀원들은 환호성을 쏟아냈다. 개발에 착수한지 6개월 만에 반도체 불모지에서 우리 손으로 일궈낸 귀한 성과였다. 국내 최초의 64k 디램 개발. 세계인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곧 세계 최첨단 기술을 보유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선언이기도 했다.

류병일 부사장
"우리가 해냈구나. 우리가 세계에서 3번째로 메모리를 생산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감격했던 시간이였습니다."


간신히 컬러 TV를 만들기 시작한 기술 후진국 한국에서 단번에 이뤄낸 64K 디램 개발. 당당히 반도체 산업에 진입한 삼성반도체는 기술개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64K 디램은 양산 체제에 들어갔고, 1984년 10월 8일 4배나 집적도가 높아진 256K 디램 개발에 성공한다.

유인촌
"반도체 64K 디램과 연이어 개발에 성공한 256K 디램. 반도체 기술에 있어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의 삼성이 미국, 일본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더군다나 아무도 이 개발이 성공할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더욱 컸습니다. 안된다는 생각은 버려라. 큰 목표를 가져라.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쏟아라. 삼성 반도체 개발팀이 밤낮으로 외워댄 반도체인의 신조입니다. 세계인들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다는 한국인의 오기와 투지가 바로 64K 디램과 256K 디램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는 일본과 미국, 그리고 반도체를 사는 주요 고객 또한 인텔, IBM, 도시바, 휴렛팩커드 등 일본과 미국의 기업들이었습니다. 이제 기술개발에 성공하고 대량 생산체제를 갖춘 삼성 반도체, 이제 대형 다국적 기업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수출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본격적인 해외 진출이 시작되었다. 반도체 최대 수입국은 역시 미국. 삼성은 256K 디램을 들고 나섰다. 당시 256K 디램은 최첨단 제품으로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이다. 삼성은 판매를 낙관했다. 그런데 인텔, IBM 등 유명 다국적 IT기업들의구매담당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품질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 다국적 기업들이 실시하고 있는 공식적인 품질인증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구매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기술개발만 하면 판매는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개발한 그 기술도 휴지조각이 될 최대의 위기였다.

기흥 사업장에 마련된 삼성 반도체 기술 연구소. 당시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은 반도체 생산업체를 능가하는 평가시스템과 분석장비, 전문 엔지니어를 보유하고 있었다. 삼성 반도체는 당장 필요한 장비들을 서둘러 마련했지만 따라갈 수는 없었다.  목표는 미국 IBM의 품질 테스트. 당시 이 임무는 품질관리부 윤정구 대리가 맡았다.

윤정구 상무
"반도체는 그냥 만들었다고 되는게 아니라, 큰 고객들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다른 고객들에게서도 가능했던 거라서, 가장 큰 회사가 IBM이었던 거죠."



자체 검사를 통해 IBM으로 보내졌던 256K 디램 샘플들이 불합격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300여개의 패키지 중 한개라도 불량이 나오면 불합격이었다. 그런데 IBM은 오로지 합격과 불합격만 판정할 뿐 구체적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 그 결함을 찾아내야 했다. 테스트 장비를 총 동원해 며칠이나 반복해서 품질 검사를 거친뒤 재심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합격이었다. 국내에서 실험할 때는 완벽하게 작동하던 샘플들이 왜 IBM 테스트에서는 불량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홍기돈 부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품질경영그룹)
"그 엔지니어들이 분석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하나하나 칩을 래핑을 해가면서 분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래핑이란 웨이퍼의 여러겹으로 쌓여있는 집적회로 칩을 하나씩 벗겨내는 작업을 말한다. 래핑 작업으로 층을 벗겨낸 뒤에는 동일조건에서 성능 테스트를 실시했다. 완성된 반도체의 성능을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처음 공정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그때 실험 도중 7볼트의 125도 온도에서 1000시간을 가열했을 때 심하게 가열되는 부분이 감지됐다.

- 옥사이드 열화현상 -

윤정구 상무
"옥사이드 층에서 열화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옥사이드 열화에 대해서는 개선방법이 옥사이드 층을 튼튼하게 해주는 방법도 있고, 옥사이드 층에 VCC(Supply Voltage)를 가하는 것을 반으로 줄여서 동작을 똑같게 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옥사이드 열화 현상을 개선방안을 윈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패키지 내부에서 열을 받아 가열된 부위가 이상현상을 보이며 깨져나갔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7볼트로 시작된 전류가 5볼트로 낮춰졌어도 1000시간을 가열하는 동안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전류를 절반인 2.5볼트로 낮추면 되지 않을까? 해결방법은 적중했다. 더이상의 열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시 테스트를 신청해 놓고 있던 어느날, 급하게 달려오는 팀원의 손에 IBM의 테스트결과가 들려 있었다. 1년 안에 받아낸 256K 디램 테스트 합격 통지서였다. 포기하지 않고 연구해온 대가는 너무나 컸다. 그것은 초유의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느냐, 아니면 반도체 하청 업체로 전락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이뤄낸 통쾌한 성공이었다.

윤정구 상무
"같이 근무하던 엔지니어들이랑 붙잡고 울고 그랬는데, 그동안 어려웠던 일들이 눈녹듯이 녹아버리더라고요."



본격적으로 수출을 시작하면서 삼성 반도체의 점유율은 87년을 기점으로 상승기류에 접어들었다. 연이어 1메가 디램 개발에 성공, 선두 기업들과의 기술격차를 2년으로 줄였다. 남은 것은 4메가 디램 개발이었다.

4메가 디램은 반도체 칩에 저장되는 용량이 커지기 때문에 기존의 방식으로는 개발이 불가능했다. 칩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그 안에 설치될 초정밀 집적회로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이때 권오현 팁장이 4메가 개발팀에 합류한다.

권오현 사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시스템LSI 사업부
"디램이라는 것은 성능을 올리고 가격을 낮추려면 작게 만들어야 되거든요. 작게 만들려면 데이터를 저장하는 셀을 작게 만들어야 하죠. 평면구조에서는 불가능한거라서, 아파트 짓듯이 높이 지어야 합니다."


이때 주어진 긴급 과제가 스택과 트렌치였다. 스택 방식은 집적회로를 웨이퍼 위에 쌓는 방식이고 트렌치 방식은 아래로 파고드는 방식을 말한다. 엄청나게 늘어난 용량을 웨이퍼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방식이 더 빠르고 효율적인 지는 입증되지 않은 상태. 이는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역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삼성은 고심 끝에 웨이퍼 위로 쌓아올리는 스택 방식을 선택한다.


권오현 사장
"메모리 시장은 타임어택이라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시간을 낭비하면 시장에서 퇴출당하니까 기술을 잘 선택해야 하는 거죠"


독자적인 연구 조사 끝에 결정한 스택 방식. 이후 삼성은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88년 시장 점유율 7위였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1192만 달러로 당당히 1위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러나 4메가 디램의 경우 선두 기업과의 기술격차는 6개월. 기술 분야에 있어서는 아직 2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4메가 디램 개발 과정에서는 Refresh 불량률 해소가 최대 관건이었다. 반도체가 내용을 저장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디지털 신호값 1이 자꾸만 0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심각한 결함이었다.

권오현 사장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고, 경쟁사는 막 출시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당시 표어가 '하루가 늦으면 수억원을 피해본다' 그걸 붙여놓고 할 정도로. 시간에 대한 피말리는 싸움을..."


디지털 신호값이 제멋대로 바뀌는 것은 내용을 저장해야 할 메모리 소자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집적회로로 통하는 전기적 장치가 불완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랜지스터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방법이 필요했다.


분석팀은 전기를 흐르게 하는 붕소, 인 등의 불순물들의 양을 절반으로 줄여버린다. 기존방식과 정반대인 역발상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트랜지스터는 안정을 되찾았다.

4메가 디램 개발이 한참 무르익고 있을 무렵 삼성에서는 사활을 건 중요한 회의가 진행중이였다. 웨이퍼 크기를 기존에 사용하던 6인치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당시 아무도 사용하지 않던 8인치로 늘릴 것인가를 논의하는 회의였다.


6인치에서 8인치로 바꾸면 투자비용이 35% 증가하지만, 생산량이 78%나 증가한다. 6인치 웨이퍼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성을 고려한다면 8인치 웨이퍼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웨이퍼를 8인치로 바꾸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6인치에 맞춰진 모든 기계 설비를 바꾸는 엄청난 신규 시설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더구나 전 세계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최초로 시작하는 대공사였다.

김재욱 사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메모리제조담당)
"8인치라는 것은 전체 다 새로운 설비로 만들어져야만 하고, 또 거기에 부수적으로 드는 개선사항 등이 있어서...."

이때 이건희 회장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며 8인치 웨이퍼를 결정한다. 다른 기업의 끝을 쫓아가면 영원히 2등에 머물 것이다. 1등을 하려면 과감히 월반을 단행해야 한다." 이에 따라 삼성은 8인치 웨이퍼로 생산을 시작했다. 다른 기업들이 웨이퍼 1장 당 200개의 칩을 생산할 때 삼성은 356개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93년 메모리 분야에서 93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선다. 반도체 일류 기업의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김재욱 사장
"여러가지 측면에서 훨씬 더 우리가 앞서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된거죠"


트랜지스터를 만들던 반도체 기술 불모지 한국에서 세계 1위에 도전장을 낸 삼성. 후발주자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8인치 웨이퍼를 통한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고 16메가 디램, 64메가 디램 등의 첨단기술 개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지 20년이 채 되지 못해 세계 시장은 삼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인촌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그것도 첨단 기술 개발 분야에서의 세계 1위. 미국과 일본을 제치고 디램 반도체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면서 드디어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였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무어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65년 인텔의 고든 무어 회장은 이 반도체 용량은 1년 6개월 주기로 2배씩 증가한다고 예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견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반도체 분야는 다른 산업에 비해서 아주 빠르게 발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의 성장을 놓고 세계는 메모리 신성장 이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삼성 반도체 기술개발을 이끌어 온 황창규 사장은 반도체 용량은 1년 6개월에 2배가 아니라, 1년에 2배씩 증가한다고 본 것입니다(메모리 신성장이론, 일명 황의법칙). 그만큼 삼성이 세계 수준보다 아주 빠른 속도로 기술개발을 하는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입니다".


"만약 2~3개월을 고삐를 늦추면 그때는 선두와의 격차가 벌어져서 더이상 회복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무한경쟁이란 말이 실감나는 분야가 바로 반도체입니다. 이 8인치 실리콘 웨이퍼 공장 설비로 대량 생산체제에 돌입한 삼성반도체.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계에서는 우리의 기술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개발하지 못한 대용량 초정밀 반도체를 과연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다른 차원이 다른 새로운 고민이었습니다."

1992년 3월 일본

삼성의 추격에 가장 놀란 이들은 일본. 미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후발주자가 선두를 따라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려운 일을 삼성이 해낸 것이다. 일본 반도체 관련 기업들과 기술진은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삼성으로서는 64메가 디램을 개발했다고 만족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 기술은 1년을 넘기기 어려운 잠시뿐의 1등이었다. 다음 과제는 256메가 디램. 황창규 팀장을 중심으로 TASK FORCE팀이 꾸려졌다.

황창규 사장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256메가 프로젝트를 처음 제가 맡았을 때 최초 70명 팀을 구성해서 개발팀을 만들었습니다. 그 개발팀의 암호명은 세계 최고의 기술을 제안한다는 의미로 테크놀로지 액설런트 프로젝트(Technology Excellent Project) 라고 명명을 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아직 개발해 내지 못한 256메가 디램. 만약 이것을 개발해낸다면 여전히 기술로는 세계 1위라고 자부하고 있는 일본을 누르고 완전한 1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은 그 물러설 수 없는 기술개발 전쟁에 돌입했다.

황창규 사장
"256메가 제품은 당시의 가장 최첨단 기술인 0.25마이크론 테크놀로지를 써야지만이 가능했습니다."



머리카락의 1/400에 해당하는 0.25마이크론미터. 256메가 디램은 이런 크기를 다룰 수 있는 초정밀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정밀한 집적회로나 배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장비부터 바꿔야 했다. 현미경을 비롯한 개발에 필요한 각종 측정 장비들이 초경량, 초정밀한 상태들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뒤져도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장비는 없었다. 구할 수 없으니 만들어야 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기계 설비 관계자들을 모아 256메가 디램 개발에 필요한 장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은 당시 256메가 디램 개발에 착수했던 미국 IBM과 일본 도시바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더 빨리 장비를 만들어  개발에 착수하느냐,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과연 기술과 시간의 싸움에서 이겨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초소형, 초정밀 집적회로를 읽어낼 장비 개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선폭이 0.25마이크론미터에 달하는 256메가 디램. 집적회로에 그 정밀한 선을 그어야 하는데 좀처럼 패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1993년 3월 기흥사업장

개발팀은 장비 설계 담당자들과 함께 문제의 원인을 찾아 나섰다. 이미 64메가 디램을 만들고 있던 상황이라 기술적인 원리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였다. 도대체 장비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마스크에 촬영된 집적회로를 웨이퍼에 옮기던 작업을 실행하던 중 드디어 핵심적인 문제를 발견했다. 패턴을 뜨는 사진장비가 문제였다.

256메가 디램은 64메가 디램과 같은 크기에 4배가 늘어난 정보를 담아야 하는 초정밀 반도체다. 그런데 같은 광선을 사용하다 보니 마스크에 촬영된 세밀한 회로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 문제는 바로 광선이었다.

이원성 전무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메모리 PA팀장)
"모양을 만들려면 파장이 필요한데, 사진 설비가 더 짧은 파장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 바로 256메가 디램 개발의 벽이었던 거죠"


64메가 디램에서 사용한 광선은 I-Line. 하지만 256메가 디램에 필요한 것은 짧은 파장의 광선 KrF였다. 즉시 설비 담당자들과 KrF를 처리할 수 있는 장비개발 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64메가 디램 개발 과정을 토대로 새로운 공정 개발에도 착수했다.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개발과 동시에 제품 양산 체제를 갖추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황창규 사장
"장비 회사에 광원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는 그런 요구를 계속 했고, 새로 만들어진 장비가 안 만들어지면 우리의 새로운 설계, 공정 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만일을 대비해서 생각해두었습니다."


드디어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장비가 완성되었다. 역대 최고 수준인 1700억원의 기술 개발비가 투자되었다.

1994년 8월 11일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94년 8월 개발작업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64메가 디램과 비교할 때 면적은 같지만, 그 위에 만들어지는 셀이 크게 늘어나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마스크도, 전기적 장치도, 웨이퍼의 설비 형태도 달라져야 했다. 개발팀은 결국 2억 5천 6백만 개의 셀이 움직이는 256메가 디램을 손에 넣었다. 30개월에 걸친 연구 끝에 만들어진 이 반도체 셀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성공이었다.


1994년 8월 29일 고대하던 256메가 디램은 만들어졌다. 일본과 미국을 제치고 일궈낸 세계 최초 개발. 이로써 일본이 주장하던 기술우위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1등이라는 오랜 숙원을 반도체가 이루어낸 것이다.

94년 삼성은 드디어 반도체 기술 개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세계가 삼성을 반도체 1위 기업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97년 말, 반도체 산업 전반에 태풍이 불어닥쳤다. 대한민국을 강타한 경제 위기 IMF를 피할 길이 없었다. 2001년에 접어들자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적자를 기록하는 최악의 불황이 닥쳤다.

반도체 시장이 어려움에 봉착한 그때. 삼성은 난관을 뚫고 나갈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플래시메모리,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그대로 유지되는 반도체인 이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또 한번의 기술개발을 이뤄낸 것이다. 1기가 비트 플래시 메모리. 차세대 신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이 반도체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였다. 

IT 산업에 필요한 부품, 조립 노하우, 신제품 개발 시스템이 전세계에서 가장 잘 갖춰진 나라 타이완. 1기가 비트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한 삼성은 이곳으로 향한다. 그동안 플래시 메모리는 주로 메모리 카드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카드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애써 기술 개발을 이루어냈는데 팔 시장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시장을 만드는 길 밖에 없었다.

시몬 챈 사장 (대만 에이-데이타 사)
"2001년 삼성이 우리를 찾아와서 플래시메모리 협력에 대해 논의할 때 우리는 삼성의 시장조사를 신뢰했다. 왜냐하면 시장조사 부분에서 삼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아이디어와 설계도에 대만기업들의 조립시스템이 결합됐다. 대용량 플래시메모리가 장착된 새로운 제품, 삼성은 USB 드라이버를 만들어 냈다. 이 새로운 제품은 불과 2년만에 전체 플래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에서 16%라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피터 슈 대표 (대만 트레센드 사)
"우리가 4년이라는 기간동안 플래시메모리 관련 제품 시장에서 50%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 삼성 덕분이다. 왜냐하면 삼성이 미래의 시장을 예측하고 우리가 정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디램 분야에서 시작해 플래시메모리까지, 삼성의 반도체 기술은 플래시메모리 시장에서도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기술개발을 향한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삼성은 해마다 더 정밀한 반도체, 크기는 작아지고 용량은 커지는 새로운 반도체를 개발해내고 있다. 다음 단계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반도체가 개발될 것인가, 지금 세계는 반도체 세계1위 한국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우리 경제 10년을 책임질 대들보 반도체 산업. 세계 1위를 향한 반도체의 쉼없는 기술 개발은 우리에게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술강국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해하지 않고 달려온 기술개발 30년. 그 목표는 처음부터 세계 1위였다.

황창규 사장
"무모하리만큼 반도체 사업에 대한 집념. 이런 도전 정신.."


열정과 도전, 그 땀과 눈물이 반도체 신화를 일구어냈다.

김재욱 사장
"초심으로 돌아가서 노력하고 도전하고 전진해 나갈 때 우리 국민들에게 좋은 삼성 반도체를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는 쫓고 쫓기는 치열한 기술개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세계 1위 삼성. 세계 최첨단 기술을 향한 도전만이 그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해 줄 것이다.

유인촌
"지난 60년간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달려왔습니다. 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뒤 2004년 우리나라의 총 수출액은 1943억 달러, 교역량 세계 10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중에서 삼성의 반도체 수출액이 150억 달러, 12년째 세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다국적 기업들은 삼성전자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며 우리를 따라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첨단 기술을 보유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면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세계인들은 이 반도체 신화를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삼성 반도체의 목표는 처음부터 1위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투자도 1위, 공장설비1위, 연구개발도 세계 최고. 지금 이 시각에도 누가 더 작은 칩을 얼마나 빨리 시장에 내 놓느냐. 세계 각국의 반도체 업계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살아남아 30년 후에도 반도체 강국으로 남기 위해 삼성전자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5년 8월 26일
KBS1 "신화창조의 비밀"
광복 60주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을 만든 4대 프로젝트
(고속도로, 제철, 자동차,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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